전 세계를 강타한 한류 열풍이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요즘이다. 아카데미, 칸 같은 대표적인 국제영화제 상을 휩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미국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한 BTS와 그 뒤를 이어 2위에 오른 블랙핑크 등….
그 활약상을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아쉽게도 미술 분야에서는 이렇다 할 젊은 스타 예술가가 배출되지 않고 있다. 반면 일본은 기존 인기 예술가에 신세대까지 가세하면서 국제 미술 시장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다.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일관계를 생각하면 달갑지 않은 마음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지만.
오늘날 세계 미술 시장에서 일본 출신 화가들이 높은 인기를 누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미술 트렌드나 각 예술가의 역량이 물론 가장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하지만 노익장을 과시하는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 1929년생)를 필두로 일본적인 팝 문화와 만화 등을 매개로 한 굵직한 계보의 형성도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뉴욕현대미술관을 비롯한 세계 유수 미술관에서의 대규모 회고전을 바탕으로 국제적으로 구축한 탄탄한 인지도와 더불어 가격 상승이 이뤄지면서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그녀는 세계 미술 시장에서 놀라울 정도로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 뒤를 이어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이는 나라(Nara Yoshitomo, 1959년생)다. 그의 대표 주제인 반항적 소녀상을 담은 회화 한 점의 경매 최고가는 무려 300억원에 육박한다.
또한 2001년에 설립한 자신의 갤러리(Kaikai Kiki)를 통해 차세대 유망주 발굴에 주력해 오늘날 일본 예술가들을 국제 무대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나라를 처음 국제 무대에 소개한 것도 기획자로서의 무라카미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을 포함해 쿠사마, 나라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뚜렷한 일본 미술 계보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무라카미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대표적인 예술가로 미스터(Mr., 1969년생)를 꼽을 수 있다. 무라카미 작업실 조수로 커리어를 시작한 그 역시 일본 대중문화, 특히 만화의 전형적인 기법과 소녀 캐릭터들을 회화 주제로 활용한다.
특히 그는 자신의 예술을 통해 사회와 단절된 채, 만화와 컴퓨터에 빠져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은둔형 외톨이 ‘오타쿠’의 심리를 대변한다. 1988년에 벌어진 아동 연쇄 살인으로 일본의 심각한 사회 문제로 급부상한 오타쿠라는 하위문화를 미술 주제로 삼고 있는 것. 필명 ‘미스터’도 유명한 야구 선수 별명에서 따온 것. 인기 스타를 몹시 좋아하는 오타쿠 심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미스터의 예술은 가정 폭력이라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서 형성된 사회에 대한 어두운 시선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그 절망으로부터의 유일한 안식처가 예술인 셈이다. 밝은 이미지의 회화를 통해 자신과 같은 오타쿠에게 희망을 준다. 따라서 그의 만화 이미지는 단순한 만화가 아니라 일본 사회의 적나라한 단면이자 하위문화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진술인 동시에 관객에게 위안을 주는 치유의 과정이다.
최근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는 매드사키(Madsaki, 1974년생)도 무라카미 갤러리 출신이다. 자신의 아내를 주제로 한 에로틱한 누드화를 비롯, 만화나 영화 같은 대중문화를 반영하는 다양하고 폭넓은 주제를 다룬다. 다빈치, 피카소처럼 미술사에서 거장의 회화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연작들도 국제 미술 시장에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국 고딕 2(American Gothic 2, 2015년)’다. 미국의 유명 화가 그랜트 우드의 상징적인 동명의 1930년작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원래 회화보다 세부 묘사를 단순화하고 흐릿하게 처리해 낙서화를 연상시키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대변하는 흘러내리는 물감 처리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무라카미 갤러리 출신 화가 가운데 근래 두드러진 활동을 통해 일본 미술 계보를 잇고 있는 타카노(Aya Takano, 1976년생)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미스터처럼 일본 오타쿠 문화를 반영하되, 어린 소녀에 대한 ‘롤리타’ 감성을 여성 관점에서 해석했다는 측면이 흥미롭다.
예를 들어 ‘날마다 축제(Every Day is A Carnival, 2012년)’를 보라. 어린 소녀 캐릭터와 풍부하고 복잡한 색채와 구성 등 타카노의 특징적인 시각 언어를 엿볼 수 있다. 세계 여러 유명 관광지 이미지를 배경으로 일본 전통의상 기모노를 입은 여자아이들의 춤추는 모습을 묘사한 이 작품에도 일본 대중문화의 상징인 만화적 요소가 크게 반영돼 있다. 더불어 일본 전통 목판화 스타일을 접목해 현대와 과거를 잇고, 자신만의 현실도피처가 필요한 현대인에게 어필하는 독창적인 회화를 창조했다.
무라카미 갤러리 출신은 아니지만 상업미술가로 시작해 독특한 무채색 회화로 국제적인 인기를 구축하고 있는 토무 고키타(Tomoo Gokita, 1969년생)도 일본 미술 계보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계보에서 막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로카쿠(Ayako Rokkaku, 1982년생)는 붓이 아니라 손을 이용해서 어린아이의 그림 같은 밝고 명랑한 분위기의 회화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기법이나 실력 측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국내 젊은 예술가들이 세계 미술 시장에서 보다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일본 같은 뚜렷한 계보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조만간 그들이 세계 미술 시장을 무대로 큰 활약을 펼쳐줄 날이 하루빨리 와주기를 기대해본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83호 (2020.11.11~11.1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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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13, 2020 at 07:55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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