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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une 28, 2020

폐결핵 재발에도 구두 수선해 내게 만화책 사준 아버지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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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식(1910∼1968)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 당시 우리 동네엔 만홧가게가 있었다. 난 만홧가게 특유의 냄새, 퀴퀴하면서도 달콤한 그런 냄새가 좋았다. 특히 일주일마다 나오는 만화책인 김산호 작가의 ‘라이파이’, 시대를 50년은 앞서간 그 만화책이 미치도록 재미있었다.

외계에서 온 악마가 타고 있는 비행접시와 대한민국의 정의의 로봇 라이파이가 지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내용으로 정말 재밌는 만화였다. 만화책 맨 뒷장에는 애독자 만화 그림 공모전이 있었다. 미술에 소질이 있는 나도 꼭 응모하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만화책을 빌려야 했다. 그러나 가난한 나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루는 만홧가게 앞에서 서성이는 내 모습을 몇 번 지켜본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어떤 만화가 그렇게 좋으냐고. 난 라이파이가 너무 좋다고 하면서 사줄 수 있느냐고 당돌하게 물었다. 아버지는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러면 설날이 며칠 안 남았으니 그때 사주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그 당시 아버지는 헌 구두나 미군들 군화를 수집해 비닐로 때우고는 길거리에 좌판을 펴 놓고 파는, 반 실업자 신세였기에 여윳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젊을 때 엄마를 너무 속썩여서 아버지는 집안에서 왕따 신세였다. 설날 새벽이었다. 아버지는 잠자고 있는 나를 살짝 깨우고는 부엌으로 데려갔다. 아버지가 가끔 잠자는 나를 살짝 깨워서 부엌으로 데려갈 땐 꼭 내 손에 뭔가를 쥐여주는 그런 날이었다. 그래서 난 아버지를 밤 도깨비처럼 생각했었다.

그날도 아버지는 언제나 그렇듯 헌 구두가 가득 채워진 배낭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더니 뭔가를 꺼냈다. “자, 이거! 이거지?” 아니, 이게 웬일인가? 생전 처음 직접 내 소유물로 만져보는 꿈에도 그리던 만화책이었다. 난 순간 이젠 만화 그림 공모전에 응모할 수 있고 머리맡에 놔두고 실컷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잽싸게 만화책을 낚아챘다. 그 순간 난 내 손에 촉촉한 뭔가가 묻는 걸 느꼈다.

난 만화책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니! 근데 이거 뭐야? 이게 뭐지? 피인가? 웬 피야? 피!” 자세히 보니 책표지 한 부분에 끈적끈적한 빨간 액체가 묻어 있었다. 냄새를 맡아보니 피가 틀림없었다. “이거 뭐야?” 내 말에 아버지는 씩 웃으며 아무 말 없이 황급히 그 피를 손으로 쓱 닦았다.

그렇듯 혼자 외롭게 떠다니시던 아버지는 쓸쓸히 이 세상을 떠나셨다. 59세의 나이에. 아버지는 폐결핵으로 영등포 시립병원에서 장기간 약을 타드시며 완치가 됐었다. 그러나 헌 구두를 비닐로 때워서 수리하면서 그 냄새와 연기 때문에 폐결핵이 재발하신 것 같았다. 잘 먹으며 요양해도 시원찮은데 각종 화학물질이 혼합된 비닐 타는 냄새를 마스크도 없이 매일 같이 들이마셨고, 어쩌다 보건소에서 나오는 폐결핵 환자용 미국 구호물품인 소고기 통조림, 우유 가루, 햄, 비타민 등은 밤 도깨비처럼 잠자는 나를 깨워서 전부 먹도록 했으니 몸이 나을 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사실을 숨기고는 남몰래 각혈하신 것이다. 그날도 만화책을 배낭에 집어넣다 각혈을 하신 것 같았다. 그런 사실도 아버지에게 딱 한 분 계신 친구분에게서 나중에 들은 얘기였다. 젊은 날에 저지른 죄 때문에 차마 말을 못하시고 혼자 각혈하며 외로움과 두려움에 남몰래 눈물 흘렸을 밤 도깨비 울 아버지. 아버지가 내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설날 선물 라이파이 만화책. 난 아버지가 사다 주신 그 만화책을 보면서 정의의 로봇 라이파이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려서 결국은 공모전에서 1등으로 당선됐다. 그 기쁨도 못 누리고 머나먼 길 떠나버린 밤 도깨비 울 아버지 보고 싶어요.

아들 김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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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9, 2020 at 08:43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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